정욕 - 아사이 료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762769

정욕 | 아사이 료 - 교보문고

 

2024.08.12 ~ 2024.08.21

 

p9

저는 줄곧 이 별에 유학을 와 있는 느낌입니다.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그런 심정입니다.
타고난 나다움을 당당하게 여기자는 마음 따윈 조금도 가져 본 적 없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 끔찍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에게 절대 관심을 품지 않을 타자를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탓에 오히려 나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러므로 축복 어린 얼굴로 "다들 달라도 괜찮아." 라고 양손 벌려 환영해도 곤란할 뿐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사회로부터 확실히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놔두길 바랍니다.
그냥 놔두기만 하면 살 테니까.

하지만 왠지, 사회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특히 조직 속에서 일하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강해집니다. 인간은 다른 이의 뒤를 캐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누군가의 타고난 속성이므로 다른 이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태어났기에 그 사람이 손에 넣은 것이나 넣지 못한 것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 그 사람을 가차 없이 판단합니다.

 

사회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게 가장 빠른 방법

 

p42

식욕은, 이렇게 이따금, 알 수 없게 된다. 자신을 배신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정당하게 존재하고 늘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수면욕과 관련된 직장을, 이직처로 선택한 것이다.
나쓰키는 여전히 자기에게는 딱 맞지 않는 실내 온도 속에서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었다. 잘 생각해 보면 온도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애당초 나는 이 세상이 설정한 커다란 길에서 벗어나 있으니까.

 

p54

드라마마다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연애 요소를 볼 때마다 그곳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사건에 얼굴을 찌푸리는 자신이 있음을 다시금 인식한다. 이 세상이 '연애 감정으로 묶이는 두 남녀'라는 최소 단위로 구축되었다는 거대한 불안이 슬쩍 건드려지기 때문이다.

 

p175

그리고 그런 장면을 만날 때마다 주위 사람들은 성적 충동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혼자만 응시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이질성을 통감했다.
그게 뭐야?
거침없이 물방울이 튀는 장면. 나쓰키는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언어 사이의 틈이 무언가에 의해 착 달라붙어 단숨에 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뭐야? 의미를 모르겠네.
처음에는 집 수도꼭지나 목욕탕 샤워기로 만족했다. 그곳에서 분수나 물방울을 연출해 허벅지에 뿌렸다. 하지만 주위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어.", "손을 잡고 싶어.", "키스하고 싶어."라고 그 상상을 부풀려 가듯 나쓰키도 좀 더 과감하게 자기 손으로 실컷 물을 분출시키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그게 뭐야? 의미를 모르겠네. 정말 웃기다.
나쓰키는 자신에 대해 일 초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기분 나쁘다. 하지만 원인 없는 일을 당연히 고칠 수는 없었다.
그게 뭐야? 의미를 모르겠네. 정말 웃기다. 하지만 미친 사람은 문제야.

 

p214

이런 일이, 지금까지 인생에서,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원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비밀을 밝힌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철저히 듣는 역할을 해내면 어느 날 갑자기 왜 너는 아무 말도 안 하느냐며 화를 낸다.
자기만 관계없다는 듯한 얼굴. 방관자인 척하는 태도.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나쓰키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오리의 눈 속 불꽃을 바라본다.
특수한 성적 지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정말로, 이 세상을 방관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정말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당신을, 완전히 벗어나 버린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없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면서."
사오리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청중의 주목을 끌어들인다.

 

평범하지 않은 성적 취향을 가진 나쓰키는 말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한 문장을 사오리는 내뱉는 그런 대조적인 표현이 좋았다.

 

 

p247

"연말연시, 힘들어."
제야의 종소리는 뇌리 바닥을 훑듯 울린다.
"내가 누군가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고 해야 할까."
화면 속에서는 쌍둥이일까, 어린 남매가 똑같은 다운재킷을 입고 즐거운 듯 뛰고 있다.
"섣달그믐날이나 설날은 인생의 성적표를 받는 날 같아."
...
"아무도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살아 놓고 이런 떄는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타지. 정말 성가셔."
TV 화면에 비치는 춥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누군가의 연말연시에 내가 뽑히는 미래, 도무지 상상이 안 돼."
이렇게 대량 생산된 것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서, 성적 취향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정도의 관계인 사람과 함께 있는 나.

 

외로움이라는 건 깊이는 달라도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공통 정서가 아닐까. 사실 여기에서 말한 취향은 내가 이해 못하는 것들이 맞긴 한데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만은 와닿았어.

 

p378

'왠지 인간들은 늘 섹스 이야기를 해.'
그건 틀림없이, 모두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시미치는 느닷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늘 섹스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항상 누군가와 정답을 확인해 보지 않으면 불안해질 정도로 윤곽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도미노의 첫 번째 조각이 쓰러지듯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품어 왔던 몇 가지 불가사의가 있어야 할 장소에 쓱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들, 불안한 것이다.
불안해서 딸기 빵에 흥분하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여자 성기에 흥분하게 된 자기가 불안해서. 이 정도 나이에 여자 성기에 관심을 지니는 게 다수파의 습성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불안해서 주위 사원을 끌어들여 험담하는 것이다. 저 녀석을 이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주위도 이물질이라고 느낀다는 사실을 통해 자기가 다수파, 즉 어엿한 인간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어서.
어엿한 인간으로 있으려면 다수파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어엿한 인간이 아니라며 관찰되고 배제되니까.
어제까지 나와 같았던 누군가에게.
도미노가 쓰러진다.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옳고 정답이라고 믿는 근거가 '다수파에 속해 있다'라는 사실뿐이라는 모순을.

 

그런데, 그만큼 무거운 돌 같은 걸로 나를 이 세상에 묶어두는 것 같아. 여기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p331

이를테면 길을 걷는다 치죠.
그러면 다양한 정보가 눈에 들어올 겁니다.
하늘의 푸름, 사람들의 발소리, 낯선 지역의 자동차 번호, 색깔, 소리, 글자, 뭐든 좋습니다. 그저 걷기만 할 뿐인데도 시야는 온통 다양한 정보로 가득해집니다.
우리는 어느새, 이 거리에는 내일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가 세세하게 쪼개져 흩어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등장인물이 여럿 등장하고, 계속 시점이 바뀌는데도 정말 쉽게 읽었다. 별개로 이름이 안 외워져서 대충 주변 맥락으로 파악하는 건 여전했지만. 정상성과 소수, 다수, 외로움 연대 ... 어쩌고 ... 그런데 뒷장의 야에코의 말에 가장 공감하고 나쓰키를 통해 이야기하는 외로움이 이해하기 쉬웠다면 일단은 나도 다수파에 속해있지 싶어. 그래서 니 잘났다! 라기보다는 뭔가 ... 읽으면서도 그런데 어린애한테 투영하는 건 나쁘지 않아? 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ㅋㅋ 여튼 갸우뚱 ... 하고 있으면 ... 너는 이해 못해! 라는 이야기를 계속 들은 것 같은 기분 ... 책은 상냥했던 것 같다.

 

아무튼 외로운 건 무서운거야.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해. 몸으로 꾹 눌러서 함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무게가 ... 결국 사사키가 체포 된 뒤에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같은 취향을 공유하고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는 존재가 계속 있어줄거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건 자기한테도 이야기하려는 걸까? 싶었다.

사람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 속해야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그게 긴밀하든 아니든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들겠지. 외롭지 않게 내일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에 이어질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